조정래와 MBC의 반박에 대한 재반박 [이영훈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
| 李榮薰 서울대학교 한국경제사 박사, 現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 경제사학회 연구이사, 「시대정신」편집위원, 저서로는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공저)」,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공저)」, 「대한민국 이야기」 등이 있음. 1. 序論:문제제기 『시대정신』지난호(35호)에서 나는 조정래 씨의 역사소설 『아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로 비판했다.(이하 존칭 생략) 1) 실재한 사건과 인물을 소재로 하는 연대기형의 역사소설을 쓸 경우 소설가는 관련 사건과 인물에 대한 자료를 광범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조정래는 그러한 준비 작업에 충실하지 않았다. 2) 심지어 그는 실재하지 않은 연대기 수준의 사건을 함부로 조작하였다.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일선 경찰이 ‘조선경찰령’에 근거하여 토지조사사업을 방해한다는 죄목으로 조선 농민을 4천 명이나 즉결 총살한 일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 법령도, 그런 사건도 없었다. 3) 마찬가지로 일본 지시마열도의 비행장 공사장으로 간 조선인 노무자 4천 명을 일본군이 방공호에 가두고 집단 학살한 사건도 없었다. 4) 소설의 주무대인 김제ㆍ만경평야가 오늘날처럼 광활하고 비옥한 평야지대로 바뀐 것은 식민지기 일본인 지주들과 수리조합의 개간 사업 때문이었다. 조정래는 그 문제를 소설의 줄거리로 다루고 있지 않다. 5) 소설에 첨부된「작가의 말」에서 조정래는 일제가 식민지기에 걸쳐 300-400만의 조선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이 같은 나의 비판에 대해 조정래는 아직 대응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어느 대학의 강연회에서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위의 4)에 대해 반박하였다. 요지인즉, 김제에는 1500년 전부터 벽골제라는 수리시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정래는 나에 대해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라고 인식공격을 하였다. 위의 4)에 대해서는 나의 논문을 읽거나 그에 관한 보도를 접한 사람들로부터도 적지 않은 질문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호남평야는 원래 황무지였다는 말인가”, “일본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논이 없었다는 말인가”라는 것이 질문의 요지였다. 동료 교수로부터도 그 같은 질문을 받았다. 지난 7월 초에는 MBC방송국이 ‘뉴스 후’라는 기획보도를 통해 나의 조정래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시도하였다. 방송국의 PD 역시 벽골제를 거론하면서 고대 이래로 그 지역에 논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들은 나를 그러한 자명한 사실조차 모르는 하찮은 연구자로 몰아 세웠다. 이 글에서 나는 우선 위의 4)에 대해 가지는 독자들의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식민지기에 걸쳐 김제ㆍ만경평야에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를 이전의 글보다 자세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에는 조정래의 『아리랑』에 대해 이전의 글에서 지면의 제약으로 생략할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비판을 추가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MBC방송이 나에게 가한 공개적인 비판은 공영방송이 준수할 보도윤리를 넘은 잘못된 처사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2. 식민지기의 김제ㆍ만경평야
벽골제에 대해 잠시 이야기한다. 15세기 초 『세종실록지리지』 김제군를 보면, 벽골제에 대해 “신라 흘해왕 21년에 비로소 둑을 쌓았는데, 길이가 1천 8백 보이다. 본조 태종 15년에 다시 쌓았으나 이익은 적고 폐단은 많았으므로 곧 허물어뜨렸다”라고 하였다. 이후 조선왕조 5백년 내내 벽골제는 허물어진 상태에 있었다. 그 1917년의 상태가 지도의 B이다. B를 자세히 살피면 방죽의 처음과 중간 부분이 허물어져 조그만 웅덩이가 파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중간 웅덩이에서 흘러나온 수로가 서쪽으로 흘러 원평천으로 들어간다. 동쪽으로 이어진 수로도 있는데 원평천 상류에 닿아있다. 이로부터 원평천 상류에 洑보가 설치되어 봇물을 끌어들여 벽골제 동쪽 평야를 관개한 다음, 그 일부가 벽골제 중간 웅덩이에 고였다가 벽골제 서쪽 평야를 관개한 뒤에 원평천 하류로 흘러들었음을 알 수 있다. 동쪽 평야를 관개한 물의 나머지 일부는 벽골제의 북쪽 웅덩이로 모인 다음, 원평천으로 방류되고 있다. 벽골제의 동과 서로 넓은 평야가 펼쳐 있는데, 이로부터 벽골제의 원래 기능이 무엇이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벽골제는 바닷물의 침입을 막는 防潮堤방조제였다. 흔히들 벽골제를 큰 저수지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넓은 평야를 막아 어찌 저수지를 만들 수 있는가. 다시 지도를 자세히 살피면 벽골제 북단의 포교리와 남단의 초승리는 자연 상태의 구릉이다. 이 두 구릉을 연결하는 방죽을 세워 동쪽의 넓은 평야를 바닷물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였다. 이것이 AD.331년 흘해왕이 세운 벽골제의 본래의 기능이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김제군 부량면에 있는 벽골제의 유적을 두 번이나 답사하였다. 벽골제 유적에서 발굴된 수리시설은 저수지의 餘水吐여수토나 暗渠水門암거수문이 아니라 바닷물의 진입을 막는 閘門갑문 시설로 보인다. 현지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벽골제가 방대한 저수지로 그려져 있는데, 충실한 고증을 거친 결과라고 보기 힘들다. 안쪽의 광대한 평야를 막아 저수지를 만들 수도 없거니와, 안쪽 평야의 희생으로 바깥의 갯벌ㆍ갯논 지역에 관개를 한다는 발상도 성립하기 힘들다. 벽골제를 방조제로 시정하여 안내판을 다시 그릴 필요가 있다. 방조제의 관리에는 밀물과 썰물 때마다 사람들을 동원하여 갑문을 올리고 내리는 등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 갑자기 비가 많이 올 경우에는 배수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폐단이 많다고 한 것은 이런 문제점 때문이었다. 이에 방조제의 중간을 허물어 봇물을 통하게 하였다. 그리고선 바닷물의 침입을 막기 위해 또 하나의 방죽을 봇물의 수로를 따라 건설하였다. 그것이 바로 지도에서 벽골제 중간 웅덩이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는 방죽이다. 방죽은 1.5km 정도 진행하다가 멈추는데, 바로 그 부분까지 만조 시의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수로를 방죽으로 보호하고 있지 않는 벽골제 서쪽 평야는 어땠을까. 바닷물의 침입이 일상적인 이른바 갯논이었다.
웅덩이를 통과하는 보의 이름을 龍洑용보라 하고 있음은 이 지도가 전하는 귀중한 정보의 하나이다. 『輿地圖書』라는 지리서 가운데 1750년대에 그려진 김제현의 지도가 하나 더 있는데, 거기서도 위와 같은 모습의 벽골제와 용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유래가 오래된 용보의 길이를 1917년 지도에서 측정하면 무려 4km나 된다. 좀더 고증이 필요하지만, 김제의 유명한 보로서 왕실이 관리하면서 水稅를 거두었던 전국적으로 유명한 보가 이 용보가 아닌가 싶다. 1872년의 지도가 전하는 또 하나의 귀중한 정보는 바닷물이 외리와 내촌 앞까지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지도의 맨 아래에 적혀 있는 “조수가 들어오면 1장이요 조수가 나가면 육지와 이어진다”(潮進一丈 潮退連陸)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지도에는 조수에 관한 정보가 하나 더 있다. 원평천이 서해로 빠지는 입구인 해창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조수가 들어오면 3장이요 조수가 나가면 육지와 이어진다”라고 하였다. 다시 1917년의 <지도1>로 돌아간다. C는 죽산면 종신리 일대이다. 신평천이란 내가 서해로 흐르고 있으며 화교라는 다리가 있다. 1872년의 <지도2>에는 보이지 않지만, 원본을 보면 화교까지 “조수가 들어오면 1장이요 조수가 나면 육지와 이어진다”고 하였다. 주목할 부분은 종신리 앞 평야에 설치된 방죽이다. 길이는 1km 정도이다. 이 역시 벽골제처럼 바닷물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대에 세워진 방죽이 아닐까 싶다. 아쉽게도 지금은 허물어져 흔적이 없다. <지도1> 밖이지만, 진봉면에도 고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여겨지는 방죽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원래 이들 방죽이 야산ㆍ구릉을 매개하면서 죽 하나로 연결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다음, D는 하시모토농장 구역이다. 지도에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 『아리랑』에서 하시모토는 1910년 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죽산면에 나타나 온갖 농간을 부리면서 농장을 마련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정확한 소개가 아니다. 하시모토 나카바[橋本央]는 노일전쟁 직후에 군산으로 건너와 무역업 등으로 치부하여 이미 1910년 이전에 익산ㆍ김제ㆍ만경 일대의 여러 곳에 도합 499정보에 달하는 농장을 개설하였다. 東津農地改良組合, 『東津農組七十年史』, 1995, 110쪽; 소순열ㆍ원용찬, 『전북의 시장경제사』, 신아, 2003, 206쪽. 하시모토농장의 사무소는 지금도 죽산면 내에, <지도1>의 E 부분에, 옛 모습 그대로 있다 (사진1)
방조제의 축조 시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논증한다. 1917년 일본육군 육지측량부가 삼각측량법으로 5만분의 1지도를 만들기 이전에 한반도를 동일 축척으로 측량한 지도가 있다. 일본육군은 청일전쟁이 끝난 1895년부터 1899년까지 측도법에 고도로 훈련된 정탐대를 비밀리에 파견하여 한반도 거의 전역을 목측법으로 측량하여 지도를 그렸다. 1996년 남영우 교수가 일본과 미국 등에 흩어져 있는 그 지도를 모두 수집하여 국내에서 영인 출간하였다. 『舊韓末韓半島1:50000地形圖』Ⅰ-Ⅳ, 成地文化社, 1996, 유감스럽게도 그 지도집에 <지도1>에 해당하는 김제는 빠져 있다. 그 대신 만경강 입구를 대상으로 두 지도를 제시한다. <지도3>이 1895-1899년의 지도이고, <지도4>가 1917년의 지도이다.
<지도1>의 방조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서포제와 대창제는 노일전쟁 이후 이곳으로 들어온 일본인 지주들의 간척사업으로 축조되었다. 지도에 의하면 1917년까지 해안선을 따라 죽산면, 성덕면, 진봉면의 끝까지 방조제가 완성된 상태였다. 이어 1924년까지는 대창제가 끝나는 그 지점부터 진봉면의 끝까지 활처럼 굽은 해안선을 약 10km의 직선으로 연결하는 실로 방대한 간척사업이 완료되었다. 간척으로 넓어진 육지의 폭은 평균 2-3km에 달한다. 그 결과 오늘날의 광활제와 그 안쪽의 광활면이 생겨났다. 동진농지개량조합의 앞의 책에서는 서포제와 대창제의 준공시기를 1927년, 광활제의 준공시기를 1924년으로 적고 있는데, 믿기 곤란하다. 이 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소략하며 믿기 어려운 기술이 많다. 언젠가 누군가 동진수리조합(농지개량조합)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다시 쓸 필요를 느낀다.
갯논이 어떠한 것인지는 의외로 조정래 소설가로부터 훌륭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바닷물의 염기를 피할 수 없는 갯논은 소출이 평답의 절반에 불과하며, 그것도 하늘이 까탈을 부리지 않고 너그럽게 넘어 갔을 경우에 한하여 가뭄을 제일 먼저 타고 홍수에 제일 먼저 내려앉는 것이 갯논이라 하였다(『아리랑』 1권 154쪽, 이하 1:154로 표기). 소설가가 만경강 하구 일대의 저습지를 두고 한 말이다. 그 갯논이 소설의 주무대인 죽산면 일대에 무진장 펼쳐 있고 그것을 옥답으로 만들기 위한 방조제 공사가 1906년경부터 거의 식민지기 내내 진행되었다. 그 공사에 역부로 동원된 김제 농민들의 긴 행렬을 상상해 보라. 소설가는 하와이에 역부로 팔려간 사람과 경부선 공사판으로 끌려간 역부에 대해서는 언급하면서(1:1-2장) 막상 소설의 주무대에서 벌어진, 오늘날의 김제를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그 공사의 현장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아리랑』은 외리에서 출발한 세 사람이 군산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징게맹갱외에밋들[김제만경평야]의 광활함과 비옥함에 대한 소설가의 찬사로 시작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루어내는 곳이라고도 하였다.(1:11) 오늘날 죽산면에서 군산 방면으로 국도 711번을 따라 가면 양지라는 곳에서 삼거리를 만난다. 거기서 광활면 쪽을 바라보면 지평선을 구경할 수 있다.(사진4)
그런데 멀리서 보면 지평선이지만 가까이 가면 바다를 연한 방조제이다. 100년 전에 김제의 농민들이 흙과 돌을 등짐으로 날라 만들기 시작한 그 방조제이다. 몇 년 뒤 새만금방조제 공사가 완료되면 허물어지고 말 그 방조제이다. 『아리랑』이 시작되는 1904년으로 돌아가면 그 지평선까지는 광활한 갯벌과 소금기로 풀이 죽어 있는 갯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조정래는 징게맹갱외에밋들의 광활함과 풍요로움을 그토록 구성지게 노래하였다. 그것을 두고 나는 소설가가 준비 작업에 충실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것이다. 3. 균전과 동학농민봉기 그렇다면 바닷물의 침입으로부터 자유로운 내륙부 평야의 사정은 어떠했던가. 내륙부에 위치한 논은 보와 저수지를 관개 수원으로 한다. <지도1>의 내륙부를 자세히 검토하면 원평천이나 신평천과 같은 하천을 수원으로 하는 보가 발달해 있다. 그런데 보는 하천 유역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봇물로써 김제ㆍ만경의 넓은 들판을 다 적실 수는 없다. 다른 한 가지 수원인 저수지의 상황은 어떠했던가. <지도1>에서 보듯이 김제읍 서쪽에 大堤대제라는 큰 저수지가 있는데, 지도의 부호에 의하면 1917년 당시 갈대밭이었다. 총독부는 합방 후부터 전국의 저수지를 국유재산으로 철저히 관리하여 저수지의 준설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럼에도 대제는 워낙 큰 저수지라서 그런지 1917년까지 준설이 되지 못하고 갈대가 무성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지도1>에 표기된 김제의 나머지 조그만 저수지는 대개 준설이 완료된 상태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지도에 의하면 소설의 주무대인 외리의 뒤편에 조그마한 저수지가 있었는데, 이 역시 1917년까지 갈대밭 상태였다. 소설에서는 외리의 차갑수가 토지조사사업을 방해한 죄목으로 당산나무에 묶여 즉결 총살을 당하자 그의 처가 실성을 하여 가까운 ‘야산자락의 조그만 저수지’에 빠져 죽는 대목이 나오는데,(1:151) 거기까지 소설가의 상상력을 흠잡을 요량은 아니지만, 엄밀히 말해 토지조사사업 초기에 사람이 빠져죽을 저수지를 김제 일대에서 찾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全羅北道扶安郡所在乙巳度各屯驛土錢與穀定賭實數現捧實數成冊』奎章閣 21146-51. 이상에서 1900년대 당시 김제ㆍ만경 일대에 분포한 대부분의 저수지가 토사로 막혀 언답과 언전으로 바뀌어 있거나 갈대밭으로 방치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한제국이란 국가는 그 저수지를 준설할 생각은 아니하고, 그것도 왕실의 땅이라고 조사하여 세를 받아먹고 있었다. 이 같은 구한말 김제ㆍ만경평야의 농업 실태를 두고 나는 이전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19세기의 김제ㆍ만경평야는 이러한 수리시설이 없었다. 더욱이 조선왕조의 공공기능이 취약해짐에 따라 그나마 있었던 시설조차 허물어져 갔다. 그에 따라 조그만 비가 오지 않아도 큰 한발이요, 조금만 비가 내려도 큰 홍수인 재난의 연속이었다. 곳곳에 버려진 땅이 즐비하게 늘린 가운데 갈대가 무성하게 숲을 이루었다. 밤이면 도처에 출몰하는 늑대의 울음으로 더욱 황량한 들판이었다. 이영훈, 「광기 서린 증오의 역사소설가 조정래 -대하소설『아리랑』을 중심으로-」, 『시대정신』35, 2007, 274. 전장에 이어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대개 위와 같은 서술의 실증적 근거를 이해하리라 믿는다. 다만 늑대의 출몰에 대해서만큼은 지금 당장 실증할 방도가 없다. 이 표현은 1992년 내가 논산의 馬九坪수리조합을 연구하면서 동 수리조합이 생기기 이전의 황막한 갈대밭을 두고 ‘狐狸의 소굴’과 같다고 한 자료를 읽은 적이 있어서 李榮薰 외, 『近代朝鮮水利組合硏究』, 一潮閣, 1992, 123쪽. 그로부터 연상한 것이다. 『시대정신』이 학술지가 아니라 대중지이기 때문에 필자로서도 다소간의 문학적 흥취가 깃들인 표현을 구사하였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이상과 같은 구한말 김제ㆍ만경평야의 농업 실태와 1904년 노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토지를 사들이기 시작한 것과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均田 또는 均畓이란 사건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이하 그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다. 1876년과 1877년, 두 해에 걸쳐 호남 지방에 엄청난 한발이 들었다. 당시의 기록은 굶어죽은 사람의 시체가 길가에 즐비하다고 하였다. 1882년과 1888년에도 큰 한발이 들었다. 연이은 자연재해로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그러자 곳곳에 수많은 토지가 묵게 되었다. 1890년 전주 전라감영의 아전 출신인 김창석이 고종과 민왕후에 접근하여 전라북도 7개 군에 ― 전주, 임피, 금구, 김제, 옥구, 태인, 부안 ― 즐비하게 묵은 땅들을 균전이란 이름을 붙여 민왕후 소관인 명례궁의 소유로 접수하였다. 그 규모가 무려 3천 석락에 달하였다.(1석락=1정보) 그리고선 개간자에 대해 약속하기를 국가에 대한 세금을 영구히 면제해 주며, 명례궁에 대한 세도 3년간 면제하고 이후는 국가에 대한 세보다 낮은 수준의 세를 받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토지를 버리고 떠난 농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왕실의 약속을 믿고 열심히 토지를 경작하였다. 그렇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토지가 다시 개간되자 호조가 국가에 대한 세금을 걷기 시작하였다. 왕실에 대한 세를 3년간 면제한다는 약속도 1년으로 단축되었다. 세의 수준도 낮지 않았다. 이에 농민들은 원래 자기들의 소유였던 토지에 대해 국가와 왕실이 중복해서 세를 걷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항의하였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났을 때 농민군들이 요구한 개혁안 가운데 균전을 폐지하라는 조항이 들어간 것은 이 때문이었다. 농민들의 요구는 농민봉기가 진압됨에 따라 마찬가지로 진압되었다. 이후에도 농민들은 상소를 올리거나 집단시위를 벌이면서 왕실의 부당한 처사를 시정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지도자들은 얻어맞고, 감옥에 갇히고, 귀양에 처해졌다. 1904년 노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인들의 내륙 진출이 본격화하였다. 군산항의 일본인들은 김제 등의 11개 군을 다니면서 토지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 때 농민들은 왕실에 부당하게 소유권을 빼앗긴 균전을 일본인들에게 팔아넘겼다. 그 정보를 접한 왕실에서는 태인 군수를 시켜 일본인에게 팔려나간 토지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도합 774석락의 전답이 몰래 팔렸는데, 그 가운데 489석락이 균답으로 밝혀졌다.
이윽고 1906년 통감부는 균전을 폐지하였다. 그렇지만 그 혜택은 조선인 농민이 아니라 일본인 지주들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요컨대 수리시설의 결여로 인한 농지의 황폐화라는 생산력의 모순이 왕실과 농민의 대립이라는 사회적 모순으로 발전하고, 그에 편승하여 일본인의 내륙 진출이 벌어지는 구한말의 비극의 역사를 이상과 같은 균전의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균전 사건은 일찍이 김용섭 교수의 논문을 통해 학계에 잘 알려진 바이다. 金容燮, 「高宗朝의 均田收賭問題」, 『東亞文化』8. 이외에 韓㳓劤, 『東學亂 起因에 관한 硏究』 및 李榮薰, 『朝鮮後期社會經濟史』, 한길사, 1988, 242-245쪽 참조. 『아리랑』의 주요 인물인 지삼출은 동학군 출신이다. 그는 1907년 의병에 참여하며, 합방이 되자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올라가 무장독립운동에 헌신한다. 조정래는 지삼출을 통해 동학농민봉기, 구한말 의병운동, 만주 무장독립투쟁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정통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소설가에게 동학농민봉기는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민중ㆍ민족주의의 역사적 근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가 농민봉기의 주 무대인 김제 일대를 소설의 무대로 선택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터이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막상 농민봉기를 야기한 가장 심각한 사회적 모순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 그 모순관계를 타고 일본인들이 그 땅에 진입하였건만 그에 대한 이해도 없었다. 약간의 충실한 준비만으로도 그는 김용섭 교수의 균전에 관한 논문을 구해 읽었을 수 있었고, 약간의 성의로 전문가의 도움을 구했으면 내가 위에서 소개한 규장각 소장의 자료도 어렵지 않게 입수하였을 터이다. 진정 그러했다면 그의 소설은 더할 나위 없는 구체적 사실성과 진지한 성찰성의 역사소설로 꾸려졌을 터이다. 요컨대 19세기말의 균전과 동학농민봉기, 20세기 초의 일본인의 균전 매집, 뒤이은 간척사업과 수리시설의 건설, 그리고 지난 논문에서 소개한 東津수리조합의 결성, 河川流域變更式 雲岩堤하천유역변경식 운암제의 준공 등은 20세기 전반 김제ㆍ만경의 역사를 소설로 쓸 때 모두 한 덩어리로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들이다. 자세하게 쓸 여유가 없지만, 이러한 줄기로 흐른 ‘식민지자본주의’에 대항하여 김제를 포함한 전북 농촌사회에서 한국 공산주의운동사의 주요 무대가 펼쳐졌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양자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렇지만 조정래는 그 어느 쪽에도 무관심하였고 몰이해하였다. 그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빼앗고 겁탈하고 죽이는 데만 관심을 두었다. 그의 소설은 20세기 김제 역사의 본류를 완전히 비켜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전의 글에서 소설가가 “끝내 그 지역의 眞의 역사와는 무관한 이방인으로 그 바깥을 맴돌았을 뿐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4. 외리와 당산나무 조정래가 연대기형 역사소설이 요구하는 치밀한 준비작업을 생략한 채 원고지와 만년필만으로 소설을 시작한 정황은 소설의 초두에서부터 확인되고 있다. 소설은 1904년 하와이로 20원에 팔려가는 방영근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나는 이 ‘원’이라는 화폐 단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시 전라도는 구화폐인 葉錢엽전의 유통구역이라 당연히 20兩이라 해야 옳다. 설령 금강 이북에서 유통된 신화폐 白銅貨를 가리키더라도 백동화 20元이면 당시 시세로 쌀 3-4말 밖에 되지 않는다. 그 돈으로 사람이 하와이까지 팔려가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다.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20원의 화폐가 백동화임을 알리는 대목이 여러 차례 나온다. 그런데 소설가는 백동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예컨대 이동만이란 소설 중의 인물이 인력거꾼에게 10원이란 거액을 기세 좋게 지불하면서 백동전 서너 개를 던졌다.(1:161) 그런데 10원이 되려면 백동전 40개를 던져야 한다. 1908년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이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교민들이 장인환의 변호를 위해 재판정에서 통역할 사람을 구하는데, 하바드에서 석사학위를 딴 이승만이 초청되었다. 1908년 7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승만은 교민들의 집에 머물지 않고 비싼 호텔에 투숙하였다. 재판이 늦어지자 이승만은 논문을 써야 한다며 매정하게 돌아가고 만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살인자의 변호에 협조할 수 없다는 말도 남겼다.(2:113) 그렇지만 이승만이 하바드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한 것은 1908년 8월의 일이고(석사학위 취득은 1910년의 일), 9월에 프린스턴 박사과정에 입학하였기에 급하게 (박사)논문을 쓸 일도 없었다. 싫든 좋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실재 인물을 소설 속에 등장시켜 이렇게 얼토당토않게 욕을 보여도 좋은지 모르겠다. 1915년 총독부는 일종의 박람회인 朝鮮物産共進會를 열었다. 거기에 일본인이 만든 고무신이 출품되어 이후 고무신바람이 불었다. 소설가는 조선인의 돈이 끝도 없이 일본인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가는 세태를 한탄하고 있다.(5:254) 그런데 실제로는 일본인이 만든 고무신은 조선인의 취향에 맞지 않아 인기가 없었다. 고무신바람이 부는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평양의 민족자본가들이 일본에서 기술을 습득해 와서 조선인의 기호에 맞는 고무신을 만들어 선풍을 일으켰다. 평양의 고무공업은 식민지기에 드물게 자생한 민족공업의 하나였다. 소설가가 1973년에 나온 조기준 교수의 『韓國企業家史』(박영사)를 읽었더라면 위와 같은 실수는 피할 수 있었을 터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꼽아내면 끝이 없으므로 한 가지만 더 지적한다. 이전의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소설가는 거의 매번 소설 속의 사건과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을 명확히 하고 있지 않다. 소설가가 소설의 주무대가 김제군의 죽산면이라고 밝히는 것은 2권 194쪽이다. 악독한 친일파 백종두가 1910년 한일합방에 기여한 공로로 죽산면의 면장에 임명되는 대목이다. 그런데 1910년 당시에 죽산면은 없었다. <지도2>에서 보듯이 홍산면 죽산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 죽산리가 죽산면이 되는 것은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는 1914년의 일로서 죽산리에 하시모토농장이 들어선 덕분이었다. 이렇게 소설가는 소설의 무대가 어떠한 행정구역인지 조사도 하지 않은 채 소설을 시작하였다. . 그러했기 때문에 감골댁, 방영근, 지삼출, 송수익, 신세호 등 소설의 주요 인물들이 사는 동네가 죽산면의 어느 동리인지도 한참 동안 불명하다. 그저 ‘동네’라고만 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동네의 당산나무 아래서 정월 대보름의 놀이가 벌어진다.(1: 256) 소설가가 동네의 이름을 죽산면의 외리라고 명확히 하는 것은 3권에 이르러서이다.(3:140, 163) 그 전에 ‘홍산리 외리’라고 표현한 대목이 있으나(2;276) 전후 맥락이 애매하다. 외리와 내촌의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장면에서인데, 서로 다른 동네를 한꺼번에 이야기할 수 없으니 불가피하게 동네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이전까지 ‘동네’로만 표기된 그 동리는 소설가 자신에게도 그 위치가 유동적이었는데, 그것은 그 동네가 만경강 하구에 위치한 것처럼 서술한 대목도 있기 때문이다.(1:258-267) 그런데 그 외리에 그가 이미 있다고 쓴 당산나무가 없다. 필자가 직접 답사한 결과 당산나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외리는 평야 구릉지대에 사방이 트인 곳에 위치하여 당산나무가 있을만한 마을이 아니다. 외리 주민의 성씨 구성을 보아도 그럴만한 마을이 아니다. 외리의 차갑수는 그 있지도 않은 당산나무에 묶여 있지도 않은 ‘조선경찰령’에 의거하여 총살을 당하였다.
5. 공영방송의 무책임한 보도 나는 오래 전부터 한국의 역사교과서가 식민지기에 일본이 토지의 40%를 빼앗고, 식량을 50%나 실어 나르고, 65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강제연행하고, 수십만 명의 여자를 정신대로 동원하여 일본군 위안부로 삼았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주장에 내게 돌아온 것은 욕설과 비방뿐이었다. 소설가처럼 명예를 얻고 돈을 번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그럼에도 어리석게도 그런 주장을 계속해 온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명확히 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국민의 역사의식도 선진화하여 한국이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내가 무엇 때문에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이 되고 싶은 사람”으로 인신공격을 받아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조정래는 지금까지 나온 나의 논문에서 나를 그렇게 공격해도 좋을만한 근거를 찾아 제시해 주길 바란다. 지난 7월초 MBC방송은 '뉴스 후’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나의 조정래 비판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매도하였다. 그 얼마 전에 MBC는 그 일로 나에게 인터뷰를 두 번이나 요청하였다. 나는 이번 일은 조정래가 나의 비판에 글로 대답할 일이지 공영방송이 개입할 일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뉴스 후’에 의하면 조정래 역시 인터뷰를 거절한 모양이다. 그렇게 논쟁의 당사자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사실의 객관적인 보도를 본래의 책무로 하는 공영방송이 나와 조정래 사이에 개입할 근거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굳이 흥미를 가지고 개입할 의사가 있으면, 이른바 ‘기획보도’라는 방식이 있는 줄 안다. 연구자가 몇 달에 걸쳐 논문을 쓰듯이 방송국의 PD들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어 숨겨진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기획보도’이다. 애쓴 ‘기획보도’는 논문보다 훌륭하다. 그런데 인터뷰를 거절한 지 불과 얼마 뒤에 MBC방송은 ‘뉴스 후’를 통해 나를 공개적으로 매도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짧은 기간에 논문과도 같은 ‘기획보도’를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방송국의 담당 PD가 조선시대와 식민지기의 역사에 대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구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무식한 가운데 제작되었다. 무식한 만큼 용감하기 때문이지 다른 무엇 때문은 아니었다. 담당 PD는 벽골제를 찾아가 삼국시대 이래 그 지역에 논이 있었다는 어느 연구자의 증언을 청취하였다. 서울대 규장각을 방문해서는 19세기 김제읍지에서 논의 면적이 얼마였다는 기록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김제의 농민들에게 마이크를 갖다 대어 일본사람들이 수리시설을 만들었지만 쌀을 모조리 가져갔지 않았느냐는 비난도 이끌어내었다. 그런데 구한말의 김제ㆍ만경평야가 수리시설이 불비하여 황폐한 상태에 있었다는 나의 주장이 어찌 그 지역에 고대 이래로 논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반박이 되겠는가. 나는 담당 PD가 역사에 대해 전혀 훈련되지 않은 문외한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에게 충고한다. 김제에 논이 있었음을 가장 확실하게 전하는 최초의 기록은 15세기 초의 『세종실록지리지』라고. 그에 의하면 김제의 논밭은 총 7,281결인데, 그 가운데 5/8이 논이었다. 담당 PD는 일본 지시마열도에서 조선인 4천 명이 학살당한 소설 속의 사건이 사실이 아니라는 나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어느 연구자를 찾아 일본군이 사할린에서 조선인을 학살한 것으로 짐작된다는 증언을 이끌어 냈다. 담당 PD는 사할린과 지시마열도를 구분조차 못하고 있다. 어찌 사할린에서 있었다고 짐작되는 사건을 가지고 지시마에서 있었던 사건의 증거로 삼으려고 하는가. 이전 글에서 나는 소설가가 의병전쟁 당시 일본군이 ‘삼광작전’이니 ‘빗질작전’ 하여 초토화작전을 펼쳐 수많은 민간인을 죽인 것이 ‘심한 과장’이라고 지적하였다. 그에 대해 MBC의 PD는 잘 알려진 F. A. 맥켄지의 『조선의 비극』(을유문화사, 1984)을 인용하면서 나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맥켄지의 잘 알려진 증언은 대한제국의 군대가 1907년 강제로 해산된 뒤 수만 명의 군인이 충북 제천과 강원도 영월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그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내가 비판한 것은 소설가가 1909년 8월부터 두 달간 호남의병을 주요 대상으로 한 이른바 ‘남한대토벌’에서 일본군이 민간인을 참혹하게 학살하는 장면을 소설 속에서 연출한 점이었다.(일례로 2:134-137 참조) 공식 기록에서 의하면 당시 호남의병의 피해는 1907년 의병전쟁의 그것에 1/40에 불과하였다. 민간을 상대로 초토화작전을 펼칠 여지는 별로 없었다. MBC의 PD는 내가 조정래의 어떤 기술을 ‘심한 과장’이라 했는지 소설 속의 해당 부분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불성실해서는 훌륭한 ‘기획보도’를 편집할 수 없다. 참고로 의병전쟁의 피해 상황에 관해 이전에 내가 읽은 적이 있는 홍순권 교수의 논문을 인용한다. 1907년 이래 의병 측 사망자는 1만 7,779명, 부상자는 376명, 포로는 2,139명이었다. 1909년 8-10월의 호남의병의 경우는 사망자 420명, 주요 의병장 26명을 포함하여 포로 1,687명이었다. 민간인 학살이나 만행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홍순권, 「의병학살의 참상과 ‘남한대토벌’」, 『역사비평』45, 1998. 이에 비해 조정래가 소설에서 기술한 피해상황은 1907년 이래 의병 측 사망자 1만 6,700명, 부상자 3만 6,800명, 불탄 집 6,000채이고, 1909년의 호남의병의 경우 사망자 4,200명이라 하였다.(2-142) 이 4,200이란 숫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식 보고치인 420명의 정확한 10배여서 억지부리로 과장했음을 알 수 있다. 불탄 집이 6,000채이면, 한 마을을 평균 20-30호로 친다면, 남한 전역에 걸쳐 200-300마을이 초토화되었다는 이야기이다. MBC의 PD들에게 묻는다. 멕켄지의 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지를. ‘뉴스 후’는 나의 조정래 비판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방송 도중에 몇 차례나 꺼내어 내가 위안부들이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간 여인으로 이야기한 것처럼 매도하였다. 이것만큼 심한 왜곡보도의 다른 예를 찾기 힘들 것이다. ‘뉴스 후’가 반복 상영한 3년 전 ‘MBC심야토론회’의 장면에서 나는 위안부라는 범죄행위가 저질러진 데는 그에 협력하는 위안소의 포주와 같은 다수의 조선인이 있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그 발언을 여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간 공창이었다는 뜻으로 보도함으로써 큰 사회적 물의가 빚어진 것은 오마이뉴스라는 인터넷 신문의 어느 경박한 기자가 그렇게 보도했기 때문이지 다른 무엇 때문은 아니었다. 3년 전에 언론이 범한 실수는 3년 뒤 MBC의 ‘뉴스 후’를 통해 정확히 반복되었다. 당초 알아듣지 못할 사람들을 상대로 복잡한 이야기를 한 나 자신의 잘못도 적지 않다. 그래서 지난 5월에 출간한 『대한민국이야기』(기파랑)라는 책에서 나는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자세하게 썼다. MBC의 PD에게 묻는다. 그대가 비판의 적으로 삼은 사람을 그대는 얼마나 성실하게 조사하였는지. 역시 세밀한 조사와 물샐 틈 없는 고증은 한국의 방송과 무관한 일인가. 한국의 방송 역시 무책임한 역사소설처럼 한 자락의 바람에 불과한 것인가. 아 역시 실증주의자 답습니다. 철저하네요. 그는 그냥 실증주의자일 뿐인데 왜 일빠로 낙인이 찍혔는지 도통 알수가 없음. 솔직히 현재 낙성대 경제 연구소 데이터 깰 수 있는 학자가 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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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1> 1917년 김제군 죽산면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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